2년여의 시간이 흐르며 팀도 나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를 지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안겨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부서 예산 관리" 였다.
예산의 개념이 달랐던 미국 회사
보통 한국 기업에서 말하는 부서 예산은 활동비, 출장비, 소모품비, 마케팅비, IT 시스템 운영비 등이 포함되고 대규모 시스템 도입처럼 큰 비용은 별도 프로젝트 예산으로 승인받아 집행한다.
하지만 미국계 기업은 이와 달리 부서 예산에 인건비까지 포함되며, 매년 “전년 대비 X% 절감”이라는 식으로 예산 목표가 내려온다. 즉, HR이 아닌 부서에서 직접 인건비를 포함한 예산을 관리해야 했고, 결국 예산 목표를 맞추려면 가장 큰 비용 항목인 사람을 줄이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자연감소(이직 등)로 맞추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줄어든 인력으로 같은 업무량을 수행해야하는 상황이 반복되어 10명이 하던 일을 9명이, 다시 7~8명이 하게 되는 식이다.
자동화와 효율화로 버티던 시간
자발적 퇴사로 인한 자연감소에 충원 없이 버티기 위해서는 업무 효율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첫 2년 동안은 “효율을 높여 극복하자”는 생각으로 절차를 단순화하고, RPA를 도입해 자동화할 수 있는 업무를 줄여나갔다.
결과적으로 연간 1,000시간 이상의 효율을 만들어냈고, 이는 FTE 기준 0.5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동화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계약서 승인처럼 리스크가 따르는 업무는 결국 매니저 선에서 컨트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여유가 줄어들던 와중, 2022년, 예산의 한계가 현실로 다가왔다.
예산의 본질이 바뀌던 순간
2021년 하반기부터 2022년 예산 계획을 세우며 상황을 버텨왔지만, 2022년 2월, 회사를 I사와 K사로 나누는 인적분할을 시행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예산승인과 관계 없이 분할이후를 기준으로 적용할 새로운 예산을 편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프로젝트와 인력의 분리가 얼마만큼 업무량에 영향을 미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top-down 방식의 일괄 삭감이 내려졌고, 이미 최소 인력으로 운영 중이던 부서에 추가 감축 지시는 매우 큰 압박이었다.
회사와 팀의 방향을 고민하던 시점에 나는 관리자들이 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1. 저성과 직원의 사직 유도
: 관리자도 결국 회사원이기에, 할당된 예산을 맞추기 위해 팀원을 구조조정하는 선택.
2. 매니저가 스스로 물러나고 팀을 지키는 선택
: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본인이 떠남으로써 팀원의 자리를 보전하는 선택.
당시 나의 상황
내 상황을 솔직히 말하자면, (고작) 3년차의 매니저였고, 아이도 커가고 있었으며, 주택담보대출도 감당 중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팀원 정리보다는 내가 남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인력에도 고생해온 팀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은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11년 I사 생활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시기였는데 머리가 빠지고, 폭음·폭식으로 체중이 늘고, 퇴사 후 삶까지 상상하게 된 시기였다.

이직 제안, 그리고 새로운 선택
그러던 어느 날,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지인이 연락을 줬다.
“우리 회사에서 사람 뽑는데, 지원해볼 생각 없어요?”
한 번도 스타트업을 고려한 적이 없었지만,
당시 시장 환경은 코로나발 저금리 기조와 시장 유동성 확대 덕에, 스타트업들은 대기업·외국계 인력을 흡수하던 시기였고, 타이밍도 완벽했다. 팀원을 자르느냐, 내가 나가느냐의 고민을 하던 참에, 부서장으로서 책임감 있는 선택과 더 좋은 조건이 동시에 주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율주행'이라는 테마를 가진, 어느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리고 당시의 선택은, 아직 세상이 주목하지 못한 보석을 먼저 발견하고 기회를 잡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11년을 넘게 다닌 회사를 떠났다.
이직은 단지 연봉이나 커리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팀을 책임지는 진짜 관리자가 되기 위한 결정이었고,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조직의 성장이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지길 기대를 하게하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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